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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무간지옥(無間地獄) #4

기사입력 2023.11.16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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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소설 무간지옥]
     
    • 무간지옥(無間地獄) : 불교에서 말하는 팔열지옥(八熱地獄)의 하나로, 사바세계(娑婆世界) 아래 2만 유순(由旬)되는 곳에 있는 지옥을 말한다.

    불교 여러 경전에 묘사된 이 지옥의 모습은 옥졸이 죄인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수레에 실은 뒤 타오르는 불길 속에 넣어 몸을 태운다.

    또한 야차들은 큰 쇠창을 불에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코·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지기도 하고, 철로 만들어진 매가 죄인의 눈을 파먹는 등 극심한 형벌을 받는 지옥으로 알려져 있다.

    #4

    “너는 지금도 사회주의자이더냐?”

    염라대왕이 이승부를 읽는데 집중하는 동안 나는 그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왕은 나의 시선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한동안 이승부에 몰두했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내 눈은 의무적인 시선 집중으로 변해갔다. 어느새 눈에는 힘이 풀려버렸고, 마음 또한 겨울날 늦은 오후 텅 빈 운동장처럼 황량하기만 했다. 그래서인지 염라대왕이 나를 향해 고개를 들었던 것도, 그가 나에게 질문을 던진 것도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뭘 그리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느냐. 너는 지금도 사회주의자냐고 물었다.”

    그제야 염라대왕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대왕이 내뱉은 ‘사회주의자’라는 용어가 유난히 크게 머릿속에 이리저리 부딪혔다. 그러면서 ‘내가 사회주의자인가?’라는 물음이 또다시 머릿속을 마구 나뒹굴었다. ‘내가 사회주의자였던가...? 내가 사회주의자인가...?’
    “그렇소. 나는 사회주의자요. 하지만 자유주의자이기도 하오.”

    정신을 가다듬고 염라대왕의 질문에 답변을 던졌다. 이미 이런 물음은 처음이 아니다. 명재욱 정부에서 민정수석으로 일하다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돼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보수진영으로부터 받았던 질문이고, 당시 내가 한 답변 그대로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염라대왕은 내 대답에 아무런 대꾸 없이 웃고만 있었다. 그런데 그 웃음의 의미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대왕의 웃음은 비웃음이 분명했다. 불쾌함이 밀려들었다. 저승을 관장하는 염라대왕이라지만, 자신의 권위를 앞세워 죽음의 강을 건너온 내 말을 저렇게 비웃다니, 참으로 무례한 인사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쓴맛을 넘길 무렵 대왕이 재차 물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동시에 신봉한다는 게 말이다. 하하하...”

    염라대왕은 어이없다는 듯 한마디 내뱉고는 큰소리로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어둠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대왕의 그런 모습에서 보수진영 인사들 얼굴이 떠올랐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에서 ‘사회주의자인 동시에 자유주의자’라는 내 답변에 그들 모두는 웃었고, 그 웃음 속에는 격멸과 조롱이 뒤섞여 있었다.

    그렇다.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것처럼 나는 사회주의자다. 그 시작은 독재정권이 한창이었던 1980년대 대학생 시절이었고, 내가 사회주의자로서 세상에 알려진 건 90년대 초반 사노맹(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 때문이다. 당시 울석대 전임강사였던 나는 직접적으로 사노맹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산하 사과원(사회주의과학원) 강령연구실장으로 사상서적 제작에 참여했었다. 결국 그게 화근이 돼 6개월의 옥살이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듬해 사면돼 다시 강단에 설 수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그 시절 나는 이미 가정이 있었다. 늘 마음속에 사회 불평등에 대한 고민과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미안함이 남아 있었지만, 최태용과 박노혁이 꿈꾸는 ‘폭력혁명’에는 동참할 수도 동참하고 싶지도 않았다. 폭력혁명을 목표로 하는 반국가단체 활동은 내 인생뿐만 아니라 내 가정, 우리 집안 모두를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노맹이 가져야 할 사회주의 이론 토대를 만드는 정도였고, 나는 그것으로 족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전히 나는 왜곡되지 않은 사회주의 가치를 믿는다. 사회적 평등이라는 그 보편적 가치가 없다면 우리 인간사회는 착취와 약탈, 억압과 지배가 만연할 테니까. 그리고 나와 내 가족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 자유주의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개인의 자유가 철저하게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폭력적 강요와 피동적 굴종만이 존재할 테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모두를 신봉한다.

    “그럼 내가 대왕에게 역으로 묻겠소.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동시에 추구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이오?”

    “하하하... 명색이 독재정권 하에서 학생운동을 했고, 이적단체인 사과원 활동도 한 네가 그걸 몰라서 묻는 게냐. 네놈 말대로라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양립할 수 있다는 게 되는데, 대학원 법학자로서 네가 한 번 설명해 보거라. 하하하...”

    나의 도발적 질문에 염라대왕은 여전히 웃으면서 대꾸했다.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국가체제로써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것과 나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주의가 어째서 양립할 수 없단 말인가.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도 얼마든지 개인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다. 사회구성원으로서 정해진 시간에 일하고, 그 밖의 시간에는 개인의 자유를 누리면 되는 것 아닌가.

    “대왕께서는 지금 지나친 비약을 한 것이오. 사회주의는 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오. 그리고 평등에는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평등, 그리고 결과의 평등이 있소. 이게 이뤄지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 또한 평등하게 보장돼야 하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평등한 기회, 평등한 과정, 평등한 결과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오.”

    “네가 말하는 부류의 내용을 이승부에서 보았다. 네가 몸담았던 정부에서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를 말했던데, 그렇다면 네 처는 왜 감옥에 있고, 너는 또 왜 재판을 받다가 이곳까지 왔느냐? 너는 지금 사상이나 학문을 네 편의에 따라 재단해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걸 이승에서는 궤변이라고 한다지. 하하하...”

    “이보시오, 대왕. 말을 삼가시오. 궤변이라니. 나는 내 삶을 통해 체득한 사상과 학자로서의 양심을 걸고 하는 말이외다.”

    “하하하하하...”

    염라대왕은 나의 언성에 아랑곳하지 않고 좀 전보다 더 큰소리로 웃었다. 그러고는 몸가짐을 정돈한 후 애초 근엄했던 얼굴 표정으로 돌아가 말을 이어갔다.

    “그래, 네 말을 들어보니 너를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구나.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네가 사회주의 폭력혁명을 꿈꾸는 노동자들과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함께한 것도 그렇고, 사회주의자라면서도 또 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그 이유도 알 것 같단 말이다. 하지만 그건 네가 만든 너만의 세상에서나 통하는 것이고, 이곳은 저승이다. 지금부터 네 내면 깊숙한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 그대로 말하지 않으면, 더 이상의 신문 없이 엄혹한 판결을 내릴 것이다.”

    “......”

    교몽당(蛟夢堂)

    무간지옥.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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