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단편소설 무간지옥(無間地獄) #10[단편소설 무간지옥] • 무간지옥(無間地獄) : 불교에서 말하는 팔열지옥(八熱地獄)의 하나로, 사바세계(娑婆世界) 아래 2만 유순(由旬)되는 곳에 있는 지옥을 말한다. 불교 여러 경전에 묘사된 이 지옥의 모습은 옥졸이 죄인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수레에 실은 뒤 타오르는 불길 속에 넣어 몸을 태운다. 또한 야차들은 큰 쇠창을 불에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코·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지기도 하고, 철로 만들어진 매가 죄인의 눈을 파먹는 등 극심한 형벌을 받는 지옥으로 알려져 있다. #10 최후진술을 마친 장민국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염라대왕을 바라봤지만, 대왕의 입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사위를 둘러싼 어둠보다 더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대왕의 표정과 몸가짐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고, 그만큼 민국의 마음은 타들어 갔다. 극도의 긴장 때문일까, 민국의 이마와 등줄기에 식은땀이 맺혔다. 온몸을 불태울 듯 열이 나더니 연신 땀이 흘렀다. 아래로 곤두박질치며 흘러내리는 땀줄기가 마치 저승으로 오기 전 베란다에서 마주했던 빗줄기 같았다. 땀줄기가 맹렬해지는 만큼 오한의 강도는 더 심해졌다. 비에 젖은 산짐승이 몸을 떨듯 민국은 순간 파르르 떨었다. 등이 젖어들고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광대뼈를 지나 턱을 따라 반소매 와이셔츠 앞부분에 떨어져 검은 피멍자국처럼 번졌다. 가슴을 죄이는 압박감과 함께 온몸에서 나는 열기, 그 열기로 몽글몽글 연신 맺혔다 흘러내리는 땀방울, 그 땀방울이 몰고 오는 한기, 이러다 몸보다도 먼저 마음이 다 타버려 재가 될 지경이었다.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호랑이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 했고,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 사노맹 사건에 연루됐을 때도 이겨냈으며, 연석진 검찰의 전방위적 수사와 압박도 견뎌내지 않았던가. 민국은 오른손으로 이마를 쓸어 닦으며 생각했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이제 시작일 수도 있는데 이렇게 마음이 무너지면 다음은 없다.’ “이승에서도, 그리고 이곳 저승에 와서도 네가 들먹인 무간지옥이 어떤 곳인지 아느냐?” 장민국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마음을 가다듬고 있던 그때 염라대왕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민국은 애써 감추고 있던 치부가 드러난 듯 재빨리 손을 내렸다. 그리고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명재욱 정부 초대 민정수석을 거쳐 법무부 장관에 발탁되면서 시작된 검찰의 집요한 수사, 그로 인해 온 가족이 겪어야만 했던 고통은 분명 무간지옥이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승에서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저승에서는 무간지옥을 들먹일 필요가 없었다. 더욱이 지옥을 관장하는 염라대왕 앞에서는...... “알고 있사옵니다. 무간지옥은 팔열지옥 중 가장 고통이 심한 지옥으로, 고통의 간극이 없다 하여 무간지옥이라 하는 줄 아옵니다.” 그랬다. 뜨거운 불로 고통받는 8가지 종류의 지옥을 말하는 팔열지옥(八熱地獄)에는 등활지옥(等活地獄), 흑승지옥(黑繩地獄), 중합지옥(衆合地獄), 호규지옥(號叫地獄), 대규지옥(大叫地獄), 염열지옥(炎熱地獄), 대열지옥(大熱地獄), 무간지옥(無間地獄)이 있다. 이들 지옥은 살인, 도둑질, 거짓말, 위선, 과음, 음행 등을 일삼은 자를 가려 각각의 지옥으로 보내진다. 이들 지옥 중에서도 특히 무간지옥은 그 규모가 가장 크고 고통도 가장 심한 지옥으로, 뜨거운 바람으로 온몸을 건조시켜 피를 말리고, 옥졸이 죄인의 가죽을 벗겨 그 가죽으로 죄인을 묶어 불 속에 집어넣어 몸을 태운다. 또한 야차들이 큰 쇠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지기도 하고, 철로 만들어진 매가 죄인의 눈을 파먹는 등 극심한 형벌을 받는 것으로 알려진 지옥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네가 경험한 그 고통이 무간지옥이라고 생각하느냐?” 장민국이 책을 통해 알고 있는 팔열지옥 속 무간지옥을 되짚던 사이 염라대왕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다시 물어왔다. “대왕이시여! 소생이 이승에서 한때 고통이 너무 크다고 느껴 무간지옥을 언급한 바 있고, 염라대왕 앞에서도 무례하게 무간지옥을 들먹였사오나 어찌 소생이 겪은 것을 그에 비하겠나이까. 소생의 무지와 무례를 용서하소서!” 장민국의 말에 염라대왕의 표정은 오히려 굳어졌다. 대왕이 입을 뗐다. “대면 첫 순간부터 나는 네놈에게 가슴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대로 답하라고 수차례 명했다. 하지만 너는 지금껏 단 한 순간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계산된 말로 네놈 자신을 합리화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가슴을 도려내는 반성보단 반성을 가장한 거짓 뉘우침으로 상황을 모면하려고만 들고 있다. 하여 참으로 괘씸하면서도 일면 가련하기까지 하구나.” “......” 장민국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아니, 대꾸할 그 무엇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네놈’이라는 염라대왕의 목소리만이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요동쳤다. “이제 판결을 내리겠노라. 네놈 생각처럼 너는 이승에서 사람을 죽인 것도, 남의 재물을 훔친 적도 없다. 그럼에도 네놈은 살생과 도둑질보다 더 나쁜 짓을 일삼았다. 그 이유는 교수라는 알량한 세속적 지위를 앞세워 네놈 자신은 실천하지도 않는 말들로 백성들 마음을 현혹했고, 또한 더 나은 삶을 바라는 백성들 마음을 도륙 냈다. 또한 권력을 얻어서도 그 권력을 백성들을 위해 쓰기보다 네놈이 신념이라고 믿는 것을 펼치는데 사용했다. 그러면서도 네놈 스스로 뿌린 결과로 돌아온 고통에 대해서는 모두 남 탓으로 일관했다. 마치 네놈이 신이라도 되는 양 그 어떤 흠도 없는 완전무결체인 척 스스로 저지른 죄에 대해 끊임없이 변명하고, 그것도 모자라 가식과 위선 그리고 거짓 선동으로 마음을 빼앗은 백성들을 끌어들여 무기로 삼았다. 이는 앞서 언급한 네놈 잘못에 비견할 수 없을 만큼 큰 죄로 천리(天理)를 거스른 것이다. 또한 네놈은 저승 문턱을 넘어 지옥을 관장하는 염라대왕 앞에서까지 네놈 죄를 강변하기 일쑤였고, 급기야 이승으로 돌아가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세치 혀에 담아 놀렸으니 저승을 조롱한 것이다. 다시 말해 네놈은 이승의 백성들을 속임으로써 천하를 어지럽혔고, 저승에 와서는 지옥을 관장하는 나 염라대왕마저 속이려 들었으니 천하지하 모두를 능욕했다 할 것이다. 이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죄로 삼족(三族)과 삼대(三代)를 멸하여 이승의 천리와 저승의 위엄을 세울 일이로다. 하여 내 너를, 네놈 스스로 거침없이 입에 담았던 무간지옥에 처하노라. 그리하여 네놈 가죽을 벗기고, 네놈 피를 말릴 것이며, 네놈 뼈를 태울 것이다. 그러나 결코 네놈 영(靈)이 쉽사리 소멸하도록 두진 않을 것이다. 억겁의 시간 속에 아주 조금씩, 아주 천천히 끊임없는 고통 속에 네놈 영이 소멸하도록 할 것이다.” 염라대왕의 거침없는 판결이 어둠 속을 파고들었고, 장민국은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새하얗게 질린 민국의 얼굴은 이미 핏기가 말라 당장이라도 영혼이 소멸할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대왕이 더욱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옥졸을 불렀다.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옥졸은 어디에 있느냐? 당장 지옥문을 열어 이놈을 무간지옥에 처넣어라.” 염라대왕의 호출이 끝나기 무섭게 금실로 수놓은 기괴한 문양의 검정색 옷을 입은 거구들이 장민국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고, 그들은 하나같이 눈, 코, 입이 제 자리에서 벗어나 마구 뒤틀린 얼굴들이었다. 옥졸들은 대왕에게 목례를 하고는 순식간에 민국의 팔을 꺾고 끌어냈다. 그제야 민국은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 몸부림은 의미 없는 항거였다. 아무리 몸에 힘을 주고 팔을 빼려 해도 옥졸들에게는 아무런 저항도 되지 못했다. 그렇게 민국은 질질 끌러나가며 피를 토하듯 아우성쳤다. “이보시오, 대왕.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판결이란 말인가. 당신이 염라대왕이라고는 하나 어찌 내 삶을 다 알 것이며, 어찌 내 마음을 다 안단 말인가. 이따위 판결은 명백한 직권남용이니, 다시 판결하라. 나를 이승으로 돌려보내라...... 놔라, 이 괴물 놈들아......” 교몽당(蛟夢堂)
-
단편소설 무간지옥(無間地獄) #9[단편소설 무간지옥] • 무간지옥(無間地獄) : 불교에서 말하는 팔열지옥(八熱地獄)의 하나로, 사바세계(娑婆世界) 아래 2만 유순(由旬)되는 곳에 있는 지옥을 말한다 . 불교 여러 경전에 묘사된 이 지옥의 모습은 옥졸이 죄인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수레에 실은 뒤 타오르는 불길 속에 넣어 몸을 태운다. 또한 야차들은 큰 쇠창을 불에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코·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지기도 하고, 철로 만들어진 매가 죄인의 눈을 파먹는 등 극심한 형벌을 받는 지옥으로 알려져 있다. #9 “대왕, 이 무슨 말이오. 최후진술도 없이 판결하다니 그건 정당한 절차가 아니오. 변호인이 없는 상황이니 최후변론은 어쩔 수 없더라도 최소한 나 스스로라도 방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합당할 것이오. 그러니 최후진술 기회를 주시오, 대왕. 부탁드리겠소.” 순간 몸도 마음도 입도 얼어붙었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최후진술 기회를 요구했다. 비록 이곳이 저승이라고는 하나, 이런 식으로 판결을 받는다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지금까지 대왕은 끊임없이 나를 의심해 왔고, 이승에서의 내 삶에 부정적이었다. 이대로 끝낸다면 자칫 이승에서의 재판보다 더 불합리한 판결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너는 여전히 이곳을 이승의 법정과 혼동하는구나.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하지만 여기는 저승이고, 이승의 법정과는 다르다. 모든 권한은 나에게 있고, 너를 심판하고 판결하는 건 오로지 나의 권능이다. 알겠느냐?” “네... 대왕. 그렇지만......” “하지만 네가 그리 간곡히 요청하니 너에게 최후진술 기회를 주겠다.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네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잘 듣고 말해야 할 것이다.” “고맙소, 대왕. 그리고 하나만 더 부탁드리고 싶소, 잠시만 시간을 주시오. 대왕의 분부처럼 가슴 속 목소리를 듣고자 하니...”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해라. 다만 곧 지옥문을 열어야 하니 마냥 시간을 지체할 순 없다. 그러니 내가 이승부 한 장을 읽는 시간만큼만 허락하겠다.” “잘 알겠소, 대왕. 거듭 감사드리오.” 염라대왕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승부를 뒤적여 어느 한 페이지에 눈을 고정시켰다. 그런 대왕의 모습을 바라보니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인지 덩달아 심장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쿵쾅거리며 심장 뛰는 소리가 그대로 머릿속에 전해져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순간 ‘염라대왕이 말하는 가슴 깊숙한 곳의 목소리란 이런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건 심장박동 소리일 뿐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말해 내 삶의 진정성을 보여 대왕을 설득할 것인가이고, 그걸 통해 이승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슴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다. 과연 지금 이 순간 이것 말고 내 가슴 속에서 또 뭐가 들릴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먼저 최후진술에 목표를 세워야 한다. 목표라... 결국 최고의 목표는 이승으로 돌아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최선의 목표는 지옥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차선으로써 최후의 목표는 지옥을 벗어나지 못할 경우 가장 고통이 덜한 지옥에 남는 것이 돼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략적 목표에 어떤 전술을 쓸 것이냐가 남는다. 내 삶에 대한 신념과 그 신념의 순수를 주장할 것인지, 아니면 염라대왕이 듣고 싶어 하는 말과 반성을 핵심 논리로 삼을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자, 정리를 해보자. 내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계기가 됐던 법무부 장관 취임에서 시작해 그 이전의 나와 그 이후의 나를 이야기하자. 그리고 내 삶의 신념과 염라대왕이 듣고 싶어 하는 반성을 3대 7할로 배분해,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감성적으로 설득하자. “이제 시간이 됐다. 최후진술을 해 보거라.” 골똘히 생각에 잠겨 최후진술 방법과 논리를 구상하고 있느라 염라대왕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그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던 그때 대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지극히 냉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거대하고도 또렷한 대왕의 시선이 단숨에 내 생각을 끊어버렸다. “먼저 지극히 존엄하신 염라대왕님께 감사 말씀드리옵니다. 허물 많은 생을 살았음에도 그 허물을 모르고 대왕님 앞에서까지 방자한 모습을 보였나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소생 이야기를 들어주셨고, 또한 이처럼 최후진술 기회까지 주신 것은 대왕님의 넓은 아량과 하해와 같은 은혜 덕분이옵니다. 다시 한 번 그 은혜에 감사의 뜻을 전하며, 최후진술을 시작하고자 하나이다.” 어법을 완전히 바꿨다. 더 이상 종전처럼 도발적 어투를 쓰지 않기로 했다. 최후진술 아닌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염라대왕을 향한 존칭에 극존대가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대왕과 대등한 양 밀리지 않으려고 강경한 말투를 쓸 때의 조마조마함을 느낄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지금부터 나는 염라대왕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어법을 시작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대왕의 심기를 누그러뜨리는 게 관건이다. 감성적 접근을 통해 동정심과 연민도 불러일으켜야 한다. 효과가 있는 것일까, 한겨울 설국처럼 맑고 또렷한 눈빛으로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염라대왕 얼굴에 아주 짧은 순간 가녀린 미소가 흐르는 듯했다. 장담할 순 없지만, 대왕의 얼굴에 찰나의 변화가 일었다. 그리고 대왕은 계속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대왕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이승에서의 제 삶은 명재욱 정부에 들어가기 전과 후로 나눠지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법무부 장관에 지명되는 순간 생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하였나이다. 시대적 과제인 검찰개혁이라는 총대를 멘 저를 검찰은 탐탁지 않게 여겼고, 전방위적 꿰맞추기 수사로 인해 저는 취임 한 달 만에 물러났사옵니다. 그리고 사모펀드와 감찰무마에 아이들 입시까지 들춰 뇌물수수와 부정청탁금지법, 공직자윤리법, 사문서위조, 증거은닉교사 등 열한 개에 달하는 혐의로 기소되었나이다. 하지만 이후 재판에서 대부분 무죄를 받았고 아이들 입시 관련해서만 유무죄를 다투다 저승으로 오게 된 것이옵니다. 이는 검찰이 저를 빌미로 검찰개혁을 방해하려 한 것이라는 반증이옵니다. 그러니 저는 희생양일 수밖에 없나이다. 그런 탓에 피해의식 때문일까, 지옥을 관장하시는 지극히 존엄하신 염라대왕님께 방자하게 굴었던 것이오니 넓은 아량을 베푸시어 저를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대왕님께 무엇을 숨기겠나이까. 실은 이승에서도, 저승에 와서도 ‘명재욱 정부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곤 했사옵니다. 그랬었다면 저는 지금도 이승에서 관서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며 무난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저의 시대정신과 시대적 소명을 회피할 생각은 없나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후회가 되옵니다. 아니, 좀 더 완벽한 인간으로 살지 못했음을 반성하고 있나이다. 무엇보다 저로 인해 고초를 겪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면 한없이 미안해지옵니다. 제 처는 저로 인해 교수직을 잃고 범죄자가 됐으며, 제 아이들은 아비로 인해 학력과 의사면허를 반납해야 했기 때문이옵니다. 그와 같은 무간지옥의 고통 속에서 남편을 잃은 제 아내와 아비를 잃은 제 아이들은 저를 대신해 세상의 비난을 맨몸으로 감수해야 할 것이 자명하옵니다. 하여 존엄하신 염라대왕님께 간청하나이다. 지금까지 소생이 범한 무례를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저를 처자가 있는 이승으로 돌려보내 주옵소서!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대왕님께서 주신 가르침을 되새겨 제 삶에 부족했던 것들을 채우고, 외지고 그늘진 곳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들과 가진 것 모두를 아낌없이 나누며 살겠나이다. 대왕님이시여! 돌려만 보내주신다면 더 이상 정부와 관련된 그 어떤 직책도 맡지 않을 것임은 물론, 일체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겠나이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다면, 그저 아내와 아이들을 살들이 보살피는 지극히 평범한 가장으로 살겠나이다. 그러니 모쪼록 제 죄를 용서하시고, 제 처자를 불쌍히 여기시어 저를 돌려보내 주실 것을 애절한 반성과 함께 간곡히 청하나이다. 염라대왕님이시여! 굽어살펴 주옵소서!” 최대한 계획했던 대로 최후진술을 하려 애는 썼지만, 마치고 나니 아쉬움이 남았다. 과거와 관련해 이런저런 이야기는 생략하길 잘한 것 같은데, 이승으로 돌아가면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부분은 빈약해 보였다. 그래도 고통 받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보살피기 위해 이승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은 동정심을 유발할 수 있으면서도 논리적이라 만족스러웠다. “그래, 다했느냐?” “예, 대왕님. 부족하나마 최후진술은 이것으로 갈음할까 하옵니다. 끝으로 다시 한 번 간곡히 청하옵니다. 너그럽게 굽어 살피시어 저를 이승으로 돌려보내 주옵소서!” 교몽당(蛟夢堂)
-
단편소설 무간지옥(無間地獄) #8[단편소설 무간지옥] • 무간지옥(無間地獄) : 불교에서 말하는 팔열지옥(八熱地獄)의 하나로, 사바세계(娑婆世界) 아래 2만 유순(由旬)되는 곳에 있는 지옥을 말한다. 불교 여러 경전에 묘사된 이 지옥의 모습은 옥졸이 죄인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수레에 실은 뒤 타오르는 불길 속에 넣어 몸을 태운다. 또한 야차들은 큰 쇠창을 불에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코·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지기도 하고, 철로 만들어진 매가 죄인의 눈을 파먹는 등 극심한 형벌을 받는 지옥으로 알려져 있다. #8 “2014년, 송포 세 모녀 자살 사건을 아느냐?” 염라대왕이 다시 ‘네놈’이라고 부른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려 자못 의연한 척하면서도 나는 대왕의 심기를 살피고 있었다. 그때 대왕이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그도 그럴 것이 송포 세 모녀 자살 사건은 나와 전혀 관련이 없었다. 당시 나는 대법원과 법무부 등 이런저런 정부기관 위원회에서 활동했었지만, 어디까지나 본업은 관서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였다. 그런 나에게 왜 이런 뜬금없는 질문을 하는 것일까? 송포 세 모녀 사건은 당연히 기억한다. 2014년 2월, 아직 찬바람이 감돌던 늦겨울 일어난 불행이었다. 단독주택 지하 월세를 살던 세 모녀가 큰딸의 만성 질환과 어머니의 실직으로 전 재산 현금 70만 원을 집세와 공과금으로 남기고 번개탄을 피워 자살한 사건이다. 당시 집 주인에게 남긴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메모가 사람들 모두의 가슴을 더 아프게 했고, 정치권은 관련법을 개정·입법하는 등 복지 사각지대 해소에 나섰다. “알고 있소.” 염라대왕이 어떤 의도로 질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나는 짧게 대답했다. 당시 사회적 파장이 적지 않은 사건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와는 무관한 사건이라 덧붙일 말도 딱히 없기도 했다. “너는 그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 염라대왕 입에서 다시 ‘너는’이라는 이인칭이 흘러나와 안도감이 들기는 했지만,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불행하고 가슴 아픈 사건에 대한 ‘생각’을 묻는 것인지, 그 사건이 갖는 ‘의미’를 묻는 것인지 선뜻 파악되지 않았다. 아니, 그 질문에 담긴 속뜻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면서 왜 대답이 없느냐. 그들 죽음에서 느끼는 게 아무것도 없더냐? 그들이야말로 네가 말한 진정한 가재고, 붕어고, 개구리인데. 아니다, 그 세 모녀는 가재, 붕어, 개구리보다 못한 이들이라 해야겠구나.” 염라대왕의 말에서 가시가 느껴졌다. 세 모녀의 불행을 이야기하며 가재, 붕어, 개구리를 언급하는 걸 보면 내가 가진 것들을 꼬집는 게 아닐까 싶었다. “왜 느끼는 게 없겠소, 당시 세상 사람 모두 가슴 아파했고, 나 또한 세 모녀의 극단적 선택에 적잖이 놀랐으니 말이오. 그래서 사회안전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소. 그리고 내가 가진 것들에 감사함을 느꼈던 같소...” “가진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그래서 너는 무엇을 했더냐?” “당시 나는 대학 교수였소. 몇몇 정부기관에서 위원회 활동을 하긴 했지만, 내가 직접 나서서 무얼 할 만한 위치는 아니었소. 그러니 나 또한 세상 사람들과 함께 가슴 아파하며, 다시는 이런 불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정치권에 사회안전망 구축을 촉구했을 따름이오.” 답변을 듣고 있는 염라대왕 얼굴은 무표정했다. 치켜세워져 있는 눈꼬리도, 거칠게 튀어나온 콧등도, 서로 맞닿아 포개져 있는 입술도 조금의 미동도 없어 완벽하게 재현된 마네킹 같았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달랐다. 너무도 또렷했다. 이전처럼 불꽃 튀는 강렬함이 아니라 맑고 투명하다 못해 극도의 냉정함이 느껴지는 그런 눈빛이었다. 그래서일까, 등골이 오싹해지는가 싶더니 귓등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그래, 그럼 이후 네가 민정수석으로, 법무부 장관으로 몸담았던 정부에서는 무얼 했느냐? 물론 너는 이 질문에 또다시 검찰개혁을 들먹이겠지만,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그런 배고픈 죽음을 막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 묻는 것이다. 네 입으로 너는 사회적 불평등 해소에 앞장섰다고 하니 말이다.” 부연 설명을 곁들인 염라대왕의 질문에서 대왕이 왜 송포 세 모녀 사건을 거론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여론과 민심을 통해 국민들 뜻을 살펴 공직사회 기강을 바로잡고, 법률적 보좌와 반부패 업무를 담당하는 민정수석이었다. 그리고 지금껏 누누이 이야기한 것처럼 검찰개혁을 위해 법무부 장관직을 수행했다. 다시 말해 기획재정부 등 경제부처나 복지부처에서 일한 게 아니다. 그러니 나로서는 국민들이 먹고사는 문제나 복지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왕의 질문이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대왕께서도 알고 있다시피 나는 민정수석과 법무부 장관을 지냈소. 그것도 법무부 장관직은 검찰개혁을 반대하는 검찰주의자들 때문에 한 달 만에 물러나야 했소. 대왕께서 무엇을 묻고 있는지는 알 것 같소만, 송파 세 모녀와 같은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일에는 관여할 수도 없었고, 관여할 시간도 없었소. 이점 헤아려 주시오.” “네 말은 옛 왕과도 같은 대통령 최측근으로 민정수석과 법무부 장관을 지냈지만, 백성들 먹고사는 문제와는 무관한 일이라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는 것이구나.” “그렇소, 대왕” 염라대왕은 대꾸 없이 맑고 청명한 눈으로 나를 잠시 바라봤다. 그리고는 이승부의 어느 페이지로 눈길을 옮겼다. 순간 까마득한 정적이 흘렀다. 시간의 흐름조차도 멈춰버린 듯한 정적은 작은 먼지 하나마저도 동작그만을 외치게 만들었다. 또다시 오한이 느껴졌다. 등골에 식은땀이 맺혔다. 사위가 칠흑 어둠으로 꽉 막혀 있어 가슴을 더욱 무겁게 압박하는 것만 같았다. 다행히 정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승부로 눈길을 돌려 조금의 움직임도 없던 염라대왕이 고개를 들어 다시 나를 응시했고, 이어 그의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왕의 목소리가 어둠에 파장을 일으키자 옥죄던 가슴도, 오한도 그 강도가 약해졌다. 왜 이런 신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일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공포 속에서의 나, 그리고 순간적으로 마주하는 침묵과 정적이 그 공포를 더욱 극한으로 끌어올리기 때문일까. “이승부를 살펴보니 네가 민정수석과 법무부 장관이었던 그 기간에도 한양을 비롯한 조선국 곳곳에서 열한 가족이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 국민을 위해 검찰개혁을 했다는 시기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계속됐다. 그렇다면 이 모든 책임은 너의 왕 명재욱에게 있는 것이더냐? 그자는 사건이 있고 나서 ‘안타깝다, 부실한 복지제도 때문’이라고 했으면서도, 정작 대통령이 되고나서 발생한 일가족 자살에는 침묵했던데.” “그렇게 볼 수도 있겠소만, 대통령이 모든 국민들 생활을 일일이 다 알 수도 없는데 그걸 명 대통령 책임이라고 하는 건 지나치다 싶소. 더욱이 옛말에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 한다’고도 하지 않았소.” 염라대왕 말에 대꾸하고 나서 ‘아차’ 싶었다.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 한다’는 옛말을 들먹였으니 말이다. 대왕이 대통령을 왕 운운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그 말이 나와 버렸다. 평소 좋아하지도 즐겨 쓰지도 않는 말인데, 하필이면 이런 때 튀어나온 것이다. 더욱이 조선은 봉건군주국이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대통령은 왕이나 나라님이 아니다. 그리고 운 좋게 태어나 모든 주권을 가진 왕은 백성들 가난을 구제하지 못해도, 국민주권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은 모든 국민이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그게 전제군주 왕과 공화국 대통령의 차이다. “그래 맞는 말이다.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만, 가난 구제는 나라님이라 해도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랜 세월 저승을 관장하고 있는 내가 그걸 모르겠느냐. 하지만 한 명의 백성이라도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그건 왕의 잘못이고, 또한 벼슬아치들 잘못이다. 더욱이 세습 왕과 달리 백성들 선택으로 대통령이 된 자와 그 관료라면 책임이 더 클 수밖에 없고. 그럼에도 너는 네가 맡은 일과는 관련이 없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만 한다. 그러면서도 검찰개혁은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는데, 백성들에게 진정 필요한 게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구나.” “대왕, 한마디 해도 되겠소?” 질문이라기보다 질책에 가까운 염라대왕의 말이 끝나고, 잠시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였다. 반박이든 내 입장이든 전하고 싶은데, 혹여 대왕의 심기를 건드리게 될까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래도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만 같아 대왕에게 양해를 구하는 의미에서 물었다. “그래, 해 보거라. 할 말이 있는 듯한데.” “고맙소, 대왕. 무엇보다 먼저 나라님도 가난 구제는 못 한다고 한 말은 내 실수요. 그러니 바라건대 그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해주시오. 은영 중에 나온 말일 뿐 평소 내 생각과는 거리가 먼 것이오. 그러나 이 말만은 하고 싶소.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일가족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고, 내가 민정수석에 법무부 장관일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니 도의적 책임이 느껴지오. 하지만 민정수석이나 법무부 장관이 경제부처나 복지부 업무를 참견할 수는 없소. 그건 명백한 월권행위니 말이오. 아마도 그건 대왕께서 내가 살다 온 조선의 통치 시스템을 잘 몰라서 하는 말 같소.” 최대한 조심스럽게 현실적인 한계와 내 입장을 염라대왕에게 전했다. 그럼에도 개운하기보다 뭔가 모를 찜찜함이 느껴졌다. 괜히 대꾸했다거나 후회된다거나 하는 판단이 아니라, 무엇이라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렇더냐. 너는 여전히 내가 왜 송포 세 모녀 사건을 거론했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다. 너는 늘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척 떠들며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입바른 소리를 해댔지만, 결국 그 모두는 자신을 위한 가식이었고 알량한 공명심을 위한 위선일 뿐이었다. 그래서 애초 너의 당돌함에 호기심이 생겨 여기까지 온 것이기는 하나 네 스스로 그걸 느끼길 바랐는데,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다. 하여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하니 이걸로 너에 대한 심문을 마치고 판결을 내리겠노라.” “......” 염라대왕이 말끝에 달라붙은 ‘판결’이라는 단어가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너무도 갑작스런 말이라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판결이라니 이 무슨 말인가. 나는 아직 다하지 못한 말들이 많다. 더욱이 최후진술도 없이 판결이라니 이건 안 될 말이다. 이승이든 저승이든 죄를 심판하기 전에 최후진술 기회는 보장돼야 한다. 그건 피의자에게 주어지는 최소한의 방어권이다. 하지만 순식간에 얼어붙은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교몽당(蛟夢堂)
-
단편소설 무간지옥(無間地獄) #7[단편소설 무간지옥] • 무간지옥(無間地獄) : 불교에서 말하는 팔열지옥(八熱地獄)의 하나로, 사바세계(娑婆世界) 아래 2만 유순(由旬)되는 곳에 있는 지옥을 말한다. 불교 여러 경전에 묘사된 이 지옥의 모습은 옥졸이 죄인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수레에 실은 뒤 타오르는 불길 속에 넣어 몸을 태운다. 또한 야차들은 큰 쇠창을 불에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코·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지기도 하고, 철로 만들어진 매가 죄인의 눈을 파먹는 등 극심한 형벌을 받는 지옥으로 알려져 있다. #7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리면 될 것을... 시간이 더 필요하겠느냐?”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초점 잃은 눈으로 염라대왕의 발끝 어디쯤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있던 장민국의 귀에 대왕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대왕의 목소리는 잔잔한 호수에 떨어진 낙엽이 일으키는 파장처럼 평온하다 못해 무심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만큼이나 대왕의 얼굴도 종전과 달리 무표정해져 있었다. 염라대왕으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을 허락받은 장민국은 가늠할 수 없는 정적의 간극을 건너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한 톨 한 톨 곱씹었다. 이승에서의 삶, 가족들, 한 달간의 법무부 장관과 검찰개혁, 자신을 향한 검찰의 전방위적 수사, 비 오는 저녁 베란다에서의 마지막 기억 등등.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신이 이승에서의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고, 지금 이 순간 저승에서 염라대왕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돌아갈 수 있느냐는 것이고. 장민국은 문득 ‘염라대왕이 왜 자꾸 내면 깊숙한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 그대로 답하라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국은 처음부터 지금껏 매 순간 대왕에게 있는 그대로 말해왔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왕의 심기를 건들만한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의 격노로 극심한 불안과 공포를 느낄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이를 뒤집어 보면 대왕은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을 ‘내면 깊숙한 곳의 목소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된다. 왜일까? “감사하오, 대왕. 덕분에 잠시나마 나 자신이 처한 상황과 이승에서의 내 삶을 되돌아볼 수 있었소. 그럼에도 너무도 갑작스레 이승의 삶을 마감하고 대왕 앞에 와 있는 현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소. 그런 탓에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소.” 장민국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나 순간적으로나마 생각하고 말해왔던 그로서는 생각 그 자체가 내면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어찌 생각이 없는데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이번에는 생각을 줄이고 솔직한 마음을 내비쳤다. 아무리 추측해 봐도 장맛비 내리는 저녁 베란다에서 잠들었을 뿐인데, 저승이라니...... “이승의 그 누구도 자신이 죽는 날을 아는 자는 없다. 이승 붙이 모두 그곳에서의 삶이 제 것인 줄 알지만, 나고 죽는 건 너희들 몫이 아니다. 그리고 저승에서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를 명심하고 네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들리는 목소리로 답해야 할 것이다.” “......” 염라대왕은 재차 장민국에게 내면의 목소리 그대로 답하라는 주문을 하고는 질문을 던졌다. “이승에서 네가 법무부 장관으로 검찰개혁을 했고, 그로 인해 너와 네 가족이 무간지옥과 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대가 한 검찰개혁은 어떤 것인가?” 염라대왕의 입에서 ‘검찰개혁’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장민국은 가슴에서 심한 통증이 느껴지며 머리가 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무엇인가 심장을 짓누르는 것 같아 숨쉬기조차 쉽지 않았다. 명재욱 대통령으로부터 법무부 장관 임명장을 받고 한 달간 전쟁을 치르듯 추진했던 검찰개혁들이 안개로 뒤덮인 숲길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대왕이 이전과는 달리 ‘네놈’이라는 표현 대신 ‘네가’라든지 ‘그대’라고 불러 의미심장함이 느껴지면서도 ‘또 무슨 꿍꿍일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장민국은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했다. 과연 나는 무엇을 한 것일까? 정부수립 70년, 그간 수사권과 기소권 모두를 가진 검찰은 거대 공룡으로 자라났고, 정권은 유한하지만 검찰은 영원한 것인 양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해 왔다. 그렇게 검찰은 거대 공룡에서 철옹성 속 괴물이 돼 버렸다. 나는 한 명의 법학자로서, 그리고 사회주의자며 자유주의자로서 괴물이 돼 버린 검찰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법무부 장관직을 수락했던 것이고, 그 한 달간 죽을힘을 다해 싸웠다. “내가 한 검찰개혁의 핵심은 특수부(특별수사부)를 축소해 검찰 권력의 별건수사를 비롯해 전방위적 수사를 제한했고, 심야 수사를 제한하는 등 검찰 수사에 있어 인권보호를 강화했소. 그리고 공개소환 전면 폐지 등 피의사실 공표를 금지했으며, 법무부의 검찰 감찰을 실질화했소. 하지만 이는 시작일 뿐 검찰개혁의 핵심은 수사권 축소에 있소. 다행히 내가 법무부를 떠난 이후 국회 법제화를 통해 경무관 이상 경찰과 검·판사를 포함한 3급 이상의 모든 선출직과 정무직, 직업공무원들 범죄를 수사하는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설치됐고, 부패와 경제사범 등의 수사 기능만 검찰에 남기고 나머지는 경찰로 이관됐으니 다행한 일이라 할 것이오. 물론 내가 법무부를 떠난 이후의 검찰개혁은 나와는 무관한 것이오. 그럼에도 대왕께 굳이 설명하는 이유는 내가 검찰개혁이라는 신호탄을 쏘아 올렸기 때문에 이후 수사권 조정이라는 진정한 검찰개혁이 가능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함이오.” 장민국은 염라대왕에게 자신이 법무부 장관에서 물러난 이후에 진행된 검찰개혁까지 조목조목 설명했다. 자신을 향해 여러 자루의 칼을 겨누고 있는 검찰과 맞서 싸우며 한 달간 검찰개혁의 물꼬를 텄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기도 했지만, 검찰의 칼끝에 떠밀려 법무부 장관에서 물러나지 않았다면 이후의 검찰개혁 또한 자신이 주도했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다. 네가 한 검찰개혁이 백성들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의문이구나. 그대가 말하는 특수부 축소와 인권보호수사 강화, 피의사실 공표 금지 강화와 법무부 검찰 감찰 실질화 모두 하루하루 제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백성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 않느냐? 과연 일반 백성이 특수부 수사를 받을 일이 얼마나 있고, 범죄가 중하지 않는 백성이 심야조사를 받고 피의사실이 공표될 일이 또 얼마나 있느냔 것이다. 그리고 법무부 검찰 감찰은 정권이 검찰을 휘두를 수 있는 구실이 될 수도 있어, 이 또한 민초들과는 딱히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 “대왕, 그건 그렇지 않소. 평범한 시민들도 충분히 특수부 조사를 받을 수 있고, 그로 인해 야간조사나 공개소환 될 수 있기 때문이오. 또한 법무부가 검찰을 2차 감찰함으로써 검찰의 과잉수사와 인권침해 수사에 철퇴를 가할 수 있어, 시민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오.” 장민국의 말이 끝나자 염라대왕은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보아라, 너와는 정적이랄 할 수 있는 조선국 전직 대통령들은 공개소환 돼 너희들이 말하는 ‘포토라인’에 섰었다. 하지만 네가 쏘아올렸다는 검찰개혁으로 공개소환이 금지됐고, 그 첫 번째 수혜자가 공교롭게도 그대 자신이었다. 그러니 이것만 봐도 네가 말하는 검찰개혁은 일반 백성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란 말이다. 네놈 생각은 어떠냐?” 염라대왕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네놈 생각은 어떠냐?’고 묻는 목소리에는 가시가 돋혀 있었다. 장민국도 대왕이 이전처럼 ‘네놈’이라고 한 것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건 그저 우연이었음을 이해해 주시오, 대왕. 만약 검찰이 나를 끌어내리기 위해 집요하게 칼날을 들이대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오. 검찰개혁을 위해 일단 시행령과 규칙을 개정해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했지만, 결국 한 달 만에 물러나야 했소. 그 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검찰 수사를 받아야만 했고. 그러니 내가 개정한 규칙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포토라인에 서지 않았을 뿐이오. 결코 나를 위해 규칙을 개정한 게 아니란 걸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소.” “그렇다 해도 과연 네가 한 검찰개혁이 백성들 입장에서 합당한 것이었느냐는 의문은 그대로 남는다. 특수부 축소나 공개소환 금지로 인한 혜택은 결국 돈이나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백성들 중 연쇄살인 같읃 흉악 범죄를 저지르는 자도 있겠지만, 대부분 힘 있는 자들이 그 수혜의 대상이니까. 그리고 그런 자들이 공개소환 되는 것을 지켜보며 백성들은 세상에 정의가 살아있음을 느꼈을 텐데, 그게 사라져 버렸지 않느냐.”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소. 대왕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나, 시민들에게 통쾌함을 주자고 범죄 혐의가 확정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공개소환을 통해 망신주기식 여론재판을 하는 건 가진 게 많든 적든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오. 더욱이 이승의 사법제도는 대법원 판결 전까지 무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하기에 그런 여론재판은 옳지 않소.” “글쎄다, 하하하하하하......” 장민국의 말에 염라대왕은 호탕하게 웃을 뿐 더 이상 반박하거나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하지만 민국은 그런 대왕을 바라보며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억울함이 밀려들었다. 법무부 장관에 취임하면서 그에게 맡겨진 가장 큰 소임은 검찰개혁이었고, 이를 시작하면서 시행령과 규칙 등 인권보호를 위해 손볼 수 있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사퇴라는 어쩔 수 없는 선택과 함께 검찰 수사를 받아야 했기에 첫 수혜자가 된 것 뿐이었다. 항변을 이어가고 싶었지만, 장민국은 애써 참았다. 그럼에도 그는 가슴 속으로 외쳤다. 만약 내가 법무부 장관 사퇴 이후를 생각해 공개소환을 금지시켰고, 포토라인에 서지 않는 특혜를 제일 먼저 누렸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음모론적 발상이다. 내가 한 달 만에 쫓기듯 장관직에서 내려와야 했던 건 검찰개혁을 조직적으로 방해한 검찰주의자들 농간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내 장민국의 마음속에 또 다른 불안이 스며들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청한 뒤 염라대왕은 종전과 달리 우호적이었으나, 어느 순간 원점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대왕은 처음 질문을 시작했던 때로 돌아갔고, 민국도 조금이나마 심리적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결국 대왕의 입에서 다시 ‘네놈’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종전처럼 극한의 공포와 두려움을 뿜어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교몽당(蛟夢堂)
-
단편소설 무간지옥(無間地獄) #6[단편소설 무간지옥] • 무간지옥(無間地獄) : 불교에서 말하는 팔열지옥(八熱地獄)의 하나로, 사바세계(娑婆世界) 아래 2만 유순(由旬)되는 곳에 있는 지옥을 말한다. 불교 여러 경전에 묘사된 이 지옥의 모습은 옥졸이 죄인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수레에 실은 뒤 타오르는 불길 속에 넣어 몸을 태운다. 또한 야차들은 큰 쇠창을 불에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코·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지기도 하고, 철로 만들어진 매가 죄인의 눈을 파먹는 등 극심한 형벌을 받는 지옥으로 알려져 있다. #6 침묵이 이어졌다. 사위가 어둠으로 둘러쳐진 공간에 정적이 감돌았다. 그 정적 속에서 염라대왕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볼 뿐 말이 없었고, 나 또한 대왕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내 눈빛은 더 이상 이전처럼 대왕의 눈빛에 맞부딪혀 불꽃을 튀기지는 못했다. 이어지는 대왕의 질문에 답하느라 지친데다, 조금씩 자신감이 사그라들어 눈빛이 흐려지고 말았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는 다짐을 곱씹고 ‘물러서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아도, 내면 어딘가에서 허물어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염라대왕의 눈빛에서 전해지는 공포와 불안은 연이은 다짐과 각오를 손쉽게 허물었다. 때로는 강력한 폭풍으로, 또 때로는 가랑비에 옷 젖듯 슬금슬금 그렇게 허물어뜨렸다. 그래서일까, 내 마음속에 점점 크게 번지고 있는 두려움은 차라리 모든 걸 자백하고 싶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대왕 발끝에 대고 삼전도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승의 삶에서 누구에게도 그렇게 해본 적 없고, 더욱이 그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에도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두 번 죽는 길을 선택하리라. 과연 염라대왕은 무슨 생각을 하며 저렇게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것일까? 그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마치 천년 사찰 입구를 지키고 있는 사천왕처럼 눈을 부릅뜨고 나를 응시하고 있다. ‘어쩌면 지금 대왕은 자신이 미륵불이라며 관심법을 일삼았다는 궁예처럼 내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건 아닐까’ 아찔한 생각이 스칠 때였다. “네놈 마음속에 움트고 있는 그 모든 생각들이 지금 이 순간 너의 참모습인 것이다.” 염라대왕이 침묵을 깨고 던진 말이 정적을 뚫고 내 귓속을 파고들었다. 부릅뜬 눈빛과 달리 대왕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대왕의 목소리가 다시 어둠을 갈랐다. “이승 어디에도 완벽한 인간은 없고, 저승으로 건너온 인간치고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영(靈)은 없다. 그게 이승과 저승에 존재하는 영원불변의 법칙이다. 그런데도 네놈은 이승에서는 완벽했고, 저승에 발을 디딘 지금은 전혀 두렵지 않은 듯 교만을 떨고 있다. 하지만 그런 교만이 통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저승이다. 이를 명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잘 알겠소이다. 하지만 대왕은 나를 잘못 판단한 것이오. 나는 이승에서의 내 삶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저 내 신념대로 살았다고 생각할 뿐. 그리고 두렵지 않은 듯 교만을 떠는 게 아니라 대왕과 마주하면서 느끼는 두려움을 극복하려 노력하고 있을 따름이오. 여기가 제아무리 저승이라 해도 두려움은 결국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니 말이오.” 염라대왕의 말에 나는 또다시 토를 달고 말았다. 가슴에는 두려움이 거침없이 자라고 있고, 머릿속에서는 이 상황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대왕 발끝에 머리라도 처박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은 여전히 대왕 심기를 거슬릴 법한 반박을 뱉어내고 있었다. 이승에서의 삶에 대한 것도 ‘아차’ 싶었지만,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읃 대왕에게 두려움 그 자체보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게 중요하다는 식의 입에 발린 말을 하고 만 것이다. 그런 탓에 이내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렇구나. 역시 네놈다운 대꾸다. 분명한 건 네놈은 지금 반성해야 할 순간에 기어이 반박만 늘어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네놈에게 뭔가를 더 듣는다는 게 시간 낭비일 것 같다만, 오랜 세월 저승을 관장하면서 네놈같이 교만하고도 오만한 자는 처음이라 흥미가 남는구나.” “......” 염라대왕의 말에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나는 솔직히 대왕에게 ‘모든 걸 인정할 테니 돌아가게 해 달라’고 간청하고 싶었다. 아니, ‘모든 걸 인정하니 이제 그만하자’고 말하고 싶다. 대왕에게서 점점 크게 느껴지는 불안과 공포, 그로부터 마음속을 잠식해 가고 있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대왕과 마주하고 대화를 이어가는 순간순간 피가 마르고 살이 삭아 없어지는 것만 같았다. 대왕이 내린 판결로 어느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지금보다는 나을 것 같은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다. 지금 이 순간이 지옥이고, 내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이승에서 빗댄 무간지옥과는 비견할 수조차 없는 심적 고통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득 아내와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다. 수감돼 있는 아내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의사 면허 취소에 기소까지 된 혜민은 또 어떻게 지낼까? 석사학위를 반납한 정민은 뭘 하고 있을까? 아내의 얼굴에 이어 딸 혜민과 막내아들 정민의 얼굴이 오래전 봤던 영화 속 주인공들 얼굴처럼 펼쳐졌다 사라진다. 네 식구 웃고 떠들던 시절의 모습과 아이들 부정입학이 세상에 들춰지면서 점점 웃음을 잃어갔던 때의 모습까지 한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머릿속에 펼쳐졌다. 가족들 얼굴이 스쳐 지나면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솟구쳤다.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옥중의 아내를 보살필 수 있고, 돌아가야 혜민과 정민의 인생을 찾아줄 수 있다. 내가 이곳에 발이 묶이면 아내는 출소해도 일상을 되찾지 못할 것이고, 아이들 또한 온전한 미래를 살아갈 수 없을 테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잃어버린 미래를 되찾아줘야 한다. 이대로 두면 혜민과 정민은 끊임없이 세인들 입방아에 오르내릴 테고, 아비 없는 세상에서 비난과 비방 속에 숨죽이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나는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 나를 옭아맨 모든 것들을 풀어내 나와 내 인생의 동지인 아내 삶, 그리고 장밋빛 인생이 예견됐던 내 아이들 삶을 제자리로 돌려놔야 한다. “그쯤 했으면 됐다. 네놈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속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짐작하고도 남는다. 내 이미 너에게 내면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대로 답하라 했다. 오로지 그 길뿐이다. 네놈이 머릿속으로 만들어낸 답변은 너를 더 큰 고통에 밀어 넣을 뿐이니까.” 아내와 아이들 생각에 사로잡혀 염라대왕 얼굴이 흐릿해져 있던 순간 대왕의 목소리가 초점을 잃은 내 눈에 튕겨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그제야 대왕의 얼굴이 또렷히 보였다. 대왕의 눈빛은 여전히 강렬했지만 그 표정은 무심한 듯 평온했고, 또 어찌 보면 아주 조금은 온화한 듯해 보이기도 했다. 대왕의 얼굴에서 온화함을 느끼고자 하는 건 어쩌면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내 마음의 착각일 수도 있으리라. “대왕, 조금만 시간을 주시오. 내가 이승에서 생을 마감하고 저승으로 건너와 대왕과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 혼란스럽소. 지금껏 대왕께서 하시는 질문에 답변하느라 내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할 겨를이 없었소. 그러니 지금이라도 대왕께서 시간을 조금만 허락하신다면 잠시나마 생각을 정리하고 싶소. 부탁드리오.” “그래, 정히 그렇다면 다음 질문을 미루마. 하지만 시간을 많이 허비할 수는 없으니, 네놈이 말하는 그 생각이란 걸 빨리 정리하거라. 내가 너를 심판하기 위해 쓸 수 있는 시간도 한정돼 있으니.” “고맙소, 대왕” 교몽당(蛟夢堂)
-
단편소설 무간지옥(無間地獄) #5[단편소설 무간지옥] • 무간지옥(無間地獄) : 불교에서 말하는 팔열지옥(八熱地獄)의 하나로, 사바세계(娑婆世界) 아래 2만 유순(由旬)되는 곳에 있는 지옥을 말한다. 불교 여러 경전에 묘사된 이 지옥의 모습은 옥졸이 죄인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수레에 실은 뒤 타오르는 불길 속에 넣어 몸을 태운다. 또한 야차들은 큰 쇠창을 불에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코·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지기도 하고, 철로 만들어진 매가 죄인의 눈을 파먹는 등 극심한 형벌을 받는 지옥으로 알려져 있다. #5 장민국은 염라대왕의 노기어린 말에 대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부릅뜬 대왕의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고, 깊게 패인 주름 사이사이에 동지섣달 겨울아침 같은 서늘함이 서려 있었다. 더욱이 대왕은 이승부를 통해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이어가는 것만 같아 두려렵기만 했다. 지금껏 그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불안에 목구멍이 얼어붙었고, 이제 그만 포기해야 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면서도 장민국은 자신이 어쩌다 저승에 온 것인지, 또 염라대왕과 왜 이런 대화를 이어가야 하는지 짜증이 밀려들었다. 이승에서 사람을 죽인 것도, 그렇다고 남의 재물을 탐한 적도 없다. 죄가 있다면 주어진 삶을 신념대로 살았다는 것 뿐이다. 세상을 바꾸고 싶었고, 부패한 사회 기득권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그 길만이 모두가 함께 잘살 수 있는 길이고, 모두가 평등의 가치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고 자부하는데, 대왕의 질문에 끌려다니는 자신의 모습은 죄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그때였다. “너는 용이더냐?” “......” 염라대왕은 이전과 달리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얼굴에 굳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고, 그 물음이 어둠을 갈랐다. 대왕의 질문에 장민국은 어리둥절했다. 저승을 관장한다는 염라대왕 입에서 나올법한 질문도, 더욱이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민국은 ‘이건 또 뭐지’ 하는 표정으로 대왕의 얼굴을 쳐다봤다. “네놈이 이 질문의 의미를 모르는 것 같으니 질문을 바꿔야겠구나. 너는 계급주의자더냐?” “그런 질문을 왜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미 사회주의자면서 자유주의자라고 밝혔소. 그런 내가 어찌 계급주의자일 수 있겠소. 사회주의도 자유주의도 계급 따위를 용납하지 않는데 말이오.” 염라대왕의 질문에 장민국의 가슴속에 두려움과 함께 뒤섞여 있던 분노가 급격하게 팽창했다. 하지만 민국은 그 분노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꼿꼿하게 앉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염라대왕의 심기 또한 폭발 직전의 다이너마이트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10여 년, 네놈 표현대로 조선 제일의 대학 교수이면서 ‘10 대 90 사회에서는 개천에서 용이 날 확률이 극히 줄어든다’ ‘개천에서 붕어, 개구리, 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따위의 글을 썼더냐.” 그제야 장민국은 염라대왕의 질문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대왕은 지금 자신이 2012년 트위터에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을 인용해 쓴 글을 문제 삼고 있었다. 오래 전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의미로 가볍게 쓴 글이었고, 잊고 지냈던 글이다. 그런데 명재욱 정부 민정수석이던 당시 보수 야권에 의해 세상에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그래서 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보시오, 대왕. 그건 이승의 속담에 비유해 모두가 잘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뜻에서 쓴 것이고, 또한 그 글은 관서대 교수로서 쓴 글이 아니라 장민국 개인 자격으로 쓴 글일 뿐이오. 그런데 도대체 그게 어찌 계급주의와 연결된단 말이오?” “정말 그걸 몰라서 묻는 게냐? 네 이놈......!” 염라대왕의 불벼락 같은 호통이 장민국을 삼킬 듯이 달려들었다. 대왕의 모습은 사냥감을 향해 포효하는 맹수 같기도 했고, 천지를 무너뜨릴 강력한 태풍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장민국은 물러서지 않았다. 대왕의 노기만큼이나 자신의 가슴속에도 만만치 않은 분노가 차올라 있었다. 더욱이 민국은 지난 삶을 통해 사회적 계급 타파에 누구보다 앞장섰음에도 계급주의자 취급을 받는 것에 모멸감이 느껴졌다. “그렇소, 도대체 그 글이 무슨 문제라고 내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며 ‘계급주의자’ 운운하냔 말이오. 대왕의 그 자리야말로 계급이고, 대왕이 나에게 하는 그 호통이야말로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것이고 보면 계급주의에서 비롯된 게 아닌지 되묻고 싶소.” 솟구쳐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장민국은 염라대왕을 거세게 쏘아붙이고서야 가슴이 조금은 후련해졌다. 하지만 이내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래서인지 거대한 두려움이 심장을 옥죄어 왔고, 온몸이 경직되며 떨리기 시작했다. 순간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의 화살이 머리에 꽂혔다. 그때 대왕의 묵직한 목소리가 예리한 칼이 되어 민국의 가슴을 찔렀다. “네 이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짓거리는 것이냐. 내 이미 네놈에게 경고한 바 있다. 내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대로 답하라고.” 장민국의 따지듯 날선 대답에 염라대왕은 분노가 끓어올랐다. 하지만 대왕의 목소리는 굵직하면서도 차분했다. 저승 문턱을 넘었지만, 여전히 상황 파악도 사리분별도 못한 채 자신의 세계에 빠져 있는 민국이 측은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승에서 제아무리 많은 재물과 권세를 누리던 자라 해도, 저승에 발을 들이는 순간 대왕 앞에 모든 영(靈)은 똑같다. 그런데도 민국은 이승에서의 삶을 고스란히 안고 저승에 서 있었다. 대왕의 눈에 민국은 지금껏 봐온 그 어떤 인간보다 참회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였다. “송구하오, 대왕. 내가 지나쳤소. 다만 대왕께서 나를 계급주의자로 몰면서 이승에서의 내 삶을 폄하하는 것에 모멸감이 느껴져 화를 참지 못했던 것이오. 어쨌든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계급주의자가 아니며, 이는 내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대로라는 점 알아주었면 고맙겠소.” “그래, 네놈의 그 오만방자함에 대해서는 잠시 미뤄두마. 아직 질문이 남았으니. 그건 그렇고 그렇다면 네가 쓴 글 이후 몇 해 뒤 ‘민중은 개·돼지’라고 말한 자는 어떠냐? 그자는 계급주의자이더냐, 아니더냐?” 장민국은 염라대왕이 말하는 그가 누구인지 바로 떠올랐다. 명재욱 정부가 들어서기 전 탄핵으로 막을 내린 보수 정권 당시 교육부 노형욱 정책기획관이 했던 말이다. 더 정확하게는 기자들과 식사하면서 영화 대사를 인용해 ‘민중은 개·돼지라 먹고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했고, 한술 더 떠 ‘신분제를 공고히 해야 한다’라고도 말해 사회적으로 엄청난 공분을 샀던 자다. “물론 나는 그를 계급주의자라고 생각하오. 이미 세상이 다 아는 것처럼 그는 ‘민중은 개·돼지’ 발언과 함께 ‘신분제를 공고히 해야 한다’라고도 했소. 만약 신분제와 관련된 발언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우월주의자일 뿐이었겠지만, 본인 입으로 신분제 타령을 했으니 당연히 계급주의자이기도 한 것 아니겠소.” “그렇다, 그놈은 우월주의자에 계급주의자가 맞다. 그런데 그놈과 네놈이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네놈은 부익부 빈익빈 ‘10 대 90’의 사회를 말하면서 ‘모두가 용이 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했지만, 넌 네가 말하는 ‘10’에 속해 있었다. 그럼에도 마치 네놈은 가재, 붕어, 개구리 중 하나인 양 글을 썼는데, 이승 어디에도 사학재단 아들로 태어나 명문대 교수인 자를 가재, 붕어, 개구리로 평가하지 않는다. 네놈 가진 재산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더욱이 너는 전임 보수 정부의 몰락으로 탄생한 진보 정권에서 민정수석에 법무부 장관까지 하게 된다. 만약 네놈 말처럼 네가 개천의 가재, 붕어, 개구리였다면 그게 가능한 일이겠느냔 말이다. 그리고 네놈이 뭐라고 누구를 용에 빗대고, 백성들을 가재니 붕어니 개구리니 하는 것이냐. 그러니 이는 네가 계급의식을 갖진 자란 것에 대한 반증일 수밖에 없다. 그게 아니라 해도 네놈은 가증스런 위선자일 뿐이고.” “대왕께서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소. 이에 대해 처음부터 밝혔듯이 나는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우리네 속담을 가지고 모두가 잘 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의미로 쓴 글일 뿐이오. 그런데 그런 식으로 곡해한다면 내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 대왕 좋을 대로 생각하시오.” 장민국은 결코 염라대왕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괘씸죄에 걸려 무간지옥보다 더한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계급주의자임을 자인할 수는 없었다. 이승의 삶에서 한순간도 계급주의자로 산적이 없는 데다, 오히려 계급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민국은 ‘나는 사회주의자에 자유주의자다. 그런 내가 계급주의자란 게 말이 되는가. 아, 내가 어쩌다 저런 자와 이런 어처구니없는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렇다면 하나 더 묻겠다. 네놈은 그 글에서 ‘하늘의 구름 쳐다보며 출혈경쟁 하지 말고 예쁘고 따뜻한 개천을 만드는데 힘을 쏟자’고 했는데, 어찌하여 인턴증명서와 표창장을 위조해 네 자식 놈들을 부당하게 대학을 보내고 대학원에 입학시켰느냐? 이는 네가 ‘하늘의 구름’이기 때문 아니더냐. 더 괘씸한 건 가재, 붕어, 개구리들에게는 출혈경쟁을 하지 말라면서, 네놈은 출혈경쟁 대신 불법을 일삼으며 백성들을 농락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변론이 있더냐?” “......” 장민국은 더 이상 염라대왕의 물음에 답변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답변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계급주의자가 아님은 분명하지만, 아이들 표창장과 인턴증명서에 문제가 있었음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이는 부모로서의 욕심이 부른 흔한 잘못이기는 하나, 이전부터 사회지도층 일부가 아름아름 관행적으로 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이승의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까지 난 상황에서 대왕의 말을 반박하면, 또다시 계급주의자니 뭐니 할 것 같았다. 염라대왕은 침묵하는 장민국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민국의 얼굴을 통해 답변 대신 침묵을 선택한 이유를 살피는 것 같았다. 민국과 대화를 이어가며 대왕은 그에게서 지독한 교만과 오만 만이 느껴졌다. 그런 탓에 대왕은 민국에 대한 심문은 더 이상 불필요 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정신세계가 일면 궁금하기도 했다. 이승부의 기록은 행적에 대한 것일 뿐, 그 행적에 대한 속마음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건 저승 문턱을 넘은 장민국이 이승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만든 정신세계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 모양새가 오만방자하기는 하나 저승으로 넘어온 영들이 보일 수 있는 게 아닌지라, 염라대왕은 문득문득 민국이 ‘산 채로 저승에 온 것인가’라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대왕의 호기심이 그에 대한 판결을 미루게 만들었다. 교몽당(蛟夢堂)
-
단편소설 무간지옥(無間地獄) #4[단편소설 무간지옥] • 무간지옥(無間地獄) : 불교에서 말하는 팔열지옥(八熱地獄)의 하나로, 사바세계(娑婆世界) 아래 2만 유순(由旬)되는 곳에 있는 지옥을 말한다. 불교 여러 경전에 묘사된 이 지옥의 모습은 옥졸이 죄인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수레에 실은 뒤 타오르는 불길 속에 넣어 몸을 태운다. 또한 야차들은 큰 쇠창을 불에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코·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지기도 하고, 철로 만들어진 매가 죄인의 눈을 파먹는 등 극심한 형벌을 받는 지옥으로 알려져 있다. #4 “너는 지금도 사회주의자이더냐?” 염라대왕이 이승부를 읽는데 집중하는 동안 나는 그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왕은 나의 시선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한동안 이승부에 몰두했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내 눈은 의무적인 시선 집중으로 변해갔다. 어느새 눈에는 힘이 풀려버렸고, 마음 또한 겨울날 늦은 오후 텅 빈 운동장처럼 황량하기만 했다. 그래서인지 염라대왕이 나를 향해 고개를 들었던 것도, 그가 나에게 질문을 던진 것도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뭘 그리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느냐. 너는 지금도 사회주의자냐고 물었다.” 그제야 염라대왕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대왕이 내뱉은 ‘사회주의자’라는 용어가 유난히 크게 머릿속에 이리저리 부딪혔다. 그러면서 ‘내가 사회주의자인가?’라는 물음이 또다시 머릿속을 마구 나뒹굴었다. ‘내가 사회주의자였던가...? 내가 사회주의자인가...?’ “그렇소. 나는 사회주의자요. 하지만 자유주의자이기도 하오.” 정신을 가다듬고 염라대왕의 질문에 답변을 던졌다. 이미 이런 물음은 처음이 아니다. 명재욱 정부에서 민정수석으로 일하다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돼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보수진영으로부터 받았던 질문이고, 당시 내가 한 답변 그대로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염라대왕은 내 대답에 아무런 대꾸 없이 웃고만 있었다. 그런데 그 웃음의 의미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대왕의 웃음은 비웃음이 분명했다. 불쾌함이 밀려들었다. 저승을 관장하는 염라대왕이라지만, 자신의 권위를 앞세워 죽음의 강을 건너온 내 말을 저렇게 비웃다니, 참으로 무례한 인사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쓴맛을 넘길 무렵 대왕이 재차 물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동시에 신봉한다는 게 말이다. 하하하...” 염라대왕은 어이없다는 듯 한마디 내뱉고는 큰소리로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어둠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대왕의 그런 모습에서 보수진영 인사들 얼굴이 떠올랐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에서 ‘사회주의자인 동시에 자유주의자’라는 내 답변에 그들 모두는 웃었고, 그 웃음 속에는 격멸과 조롱이 뒤섞여 있었다. 그렇다.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것처럼 나는 사회주의자다. 그 시작은 독재정권이 한창이었던 1980년대 대학생 시절이었고, 내가 사회주의자로서 세상에 알려진 건 90년대 초반 사노맹(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 때문이다. 당시 울석대 전임강사였던 나는 직접적으로 사노맹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산하 사과원(사회주의과학원) 강령연구실장으로 사상서적 제작에 참여했었다. 결국 그게 화근이 돼 6개월의 옥살이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듬해 사면돼 다시 강단에 설 수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그 시절 나는 이미 가정이 있었다. 늘 마음속에 사회 불평등에 대한 고민과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미안함이 남아 있었지만, 최태용과 박노혁이 꿈꾸는 ‘폭력혁명’에는 동참할 수도 동참하고 싶지도 않았다. 폭력혁명을 목표로 하는 반국가단체 활동은 내 인생뿐만 아니라 내 가정, 우리 집안 모두를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노맹이 가져야 할 사회주의 이론 토대를 만드는 정도였고, 나는 그것으로 족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전히 나는 왜곡되지 않은 사회주의 가치를 믿는다. 사회적 평등이라는 그 보편적 가치가 없다면 우리 인간사회는 착취와 약탈, 억압과 지배가 만연할 테니까. 그리고 나와 내 가족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 자유주의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개인의 자유가 철저하게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폭력적 강요와 피동적 굴종만이 존재할 테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모두를 신봉한다. “그럼 내가 대왕에게 역으로 묻겠소.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동시에 추구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이오?” “하하하... 명색이 독재정권 하에서 학생운동을 했고, 이적단체인 사과원 활동도 한 네가 그걸 몰라서 묻는 게냐. 네놈 말대로라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양립할 수 있다는 게 되는데, 대학원 법학자로서 네가 한 번 설명해 보거라. 하하하...” 나의 도발적 질문에 염라대왕은 여전히 웃으면서 대꾸했다.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국가체제로써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것과 나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주의가 어째서 양립할 수 없단 말인가.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도 얼마든지 개인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다. 사회구성원으로서 정해진 시간에 일하고, 그 밖의 시간에는 개인의 자유를 누리면 되는 것 아닌가. “대왕께서는 지금 지나친 비약을 한 것이오. 사회주의는 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오. 그리고 평등에는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평등, 그리고 결과의 평등이 있소. 이게 이뤄지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 또한 평등하게 보장돼야 하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평등한 기회, 평등한 과정, 평등한 결과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오.” “네가 말하는 부류의 내용을 이승부에서 보았다. 네가 몸담았던 정부에서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를 말했던데, 그렇다면 네 처는 왜 감옥에 있고, 너는 또 왜 재판을 받다가 이곳까지 왔느냐? 너는 지금 사상이나 학문을 네 편의에 따라 재단해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걸 이승에서는 궤변이라고 한다지. 하하하...” “이보시오, 대왕. 말을 삼가시오. 궤변이라니. 나는 내 삶을 통해 체득한 사상과 학자로서의 양심을 걸고 하는 말이외다.” “하하하하하...” 염라대왕은 나의 언성에 아랑곳하지 않고 좀 전보다 더 큰소리로 웃었다. 그러고는 몸가짐을 정돈한 후 애초 근엄했던 얼굴 표정으로 돌아가 말을 이어갔다. “그래, 네 말을 들어보니 너를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구나.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네가 사회주의 폭력혁명을 꿈꾸는 노동자들과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함께한 것도 그렇고, 사회주의자라면서도 또 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그 이유도 알 것 같단 말이다. 하지만 그건 네가 만든 너만의 세상에서나 통하는 것이고, 이곳은 저승이다. 지금부터 네 내면 깊숙한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 그대로 말하지 않으면, 더 이상의 신문 없이 엄혹한 판결을 내릴 것이다.” “......” 교몽당(蛟夢堂)
-
단편소설 무간지옥(無間地獄) #3[단편소설 무간지옥] • 무간지옥(無間地獄) : 불교에서 말하는 팔열지옥(八熱地獄)의 하나로, 사바세계(娑婆世界) 아래 2만 유순(由旬)되는 곳에 있는 지옥을 말한다. 불교 여러 경전에 묘사된 이 지옥의 모습은 옥졸이 죄인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수레에 실은 뒤 타오르는 불길 속에 넣어 몸을 태운다. 또한 야차들은 큰 쇠창을 불에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코·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지기도 하고, 철로 만들어진 매가 죄인의 눈을 파먹는 등 극심한 형벌을 받는 지옥으로 알려져 있다. #3 염라대왕은 무간지옥을 입에 담는 장민국의 도발적인 말에 가슴 깊숙한 곳에서 화가 치밀었다. 지금껏 저승 문턱을 넘은 수많은 인간들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이승에서의 삶을 무간지옥에 비유하는 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선행을 다하며 산 이도, 악행을 일삼으며 세상을 더럽힌 자도, 먹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 대다 온 사람도 회한의 넋두리를 늘어놓기 일쑤였다. 특히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일찍 생을 마감한 자들은 어김없이 돌아가게 해달라고 애걸복걸이었다. 그런데 장민국은 이승에서의 삶을 무간지옥에 비유했다. 거기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기보다 모든 걸 남 탓으로 돌렸다. 더욱이 저승의 무간지옥이 어떤 곳인지, 어떤 형벌로 가득한 곳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서슴없이 무간지옥을 입에 담는 모습에서 보기 드문 교만이 느껴졌다. 치밀어 오르는 괘씸함을 가라앉히고 염라대왕이 다시 물었다. “그럼 넌 죄가 없는데, 그 검찰총장이란 자가 네 죄를 만들었다는 것이냐? 같은 정부의 검찰총장이 법무부 장관에게 없는 죄를 만든다는 게 말이 되느냐. 좀 자세히 말해 보거라.” 염라대왕의 질문에 장민국은 자신도 모르게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 옛 일처럼 가슴 속 깊숙한 곳에 까마득히 묻어두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전임 정권 수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연석진을 검찰종장으로 추천했던 그날, 이후에 펼쳐질 상황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대통령이 임명장을 주던 날 서로 마주보며 환하게 웃었던 기억이 송곳이 되어 욱신욱신 뇌리를 찔렀다. 찰나의 정적이 흐르고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자가 나와 관련해 만든 죄는 총 세 가지요. 내 부친의 평생 꿈이었던 양동학원, 그러니까 양동학원 사무국장으로 일한 동생에게 채용비리와 소송사기라는 죄목을 덮어씌워 결과적으로 양동학원을 비리 재단으로 만들었소. 그리고 아내가 5촌 조카와 사모펀드 주식투자 범죄를 저지른 후 증거를 인멸한 것으로 꿰맞췄으며, 또한 아내와 나를 자식들 입학 서류를 조작한 파렴치한으로 몰았소. 하지만 이 모두는 나를 옭아매기 위한 것으로, 먼지털이식 별건수사를 통해 짜맞춰진 것이오. 그리고 법원은 검찰이 쳐놓은 프레임에 놀아난 것이고.” “그러니까 네 말을 영화에 비유하자면, 검찰이 쓴 시나리오에 법원은 조연으로 등장했고, 이 영화를 연출한 자가 연석진이라는 것이로구나. 그런데 말이다. 네 말대로라면 이승의 판사들이 바보들이란 말 밖에 안 되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장민국의 말에 염라대왕의 의문은 더 커졌다. 이승의 판사들은 저승의 최고 판관인 자신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자들이기에 하는 일 자체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짜놓은 데로 결론을 낸다는 게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승의 재판은 3심제인데, 장민국의 말대로라면 1심과 항고심, 대법원 상고심 판사들까지 모조리 꼭두각시나 다름없다는 게 되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의문과 의심을 차곡차곡 쌓아가던 염라대왕을 향해 장국진이 입을 열었다. “과거 조선에서는 사법살인이 횡횡했었소이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 수사기관과 법원이 증거를 조작하고 법률을 왜곡해 없는 죄를 만들었소. 그로 인해 하루아침에 죽기도 하고, 죽이지 않더라도 유죄를 선고해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일이 다반사였단 말이오. 그 대표적인 예가 인혁당 사건이고, 최근에는 한양시 공무원인 탈북민 최칠성 간첩 조작 사건이오. 그리고 이 사건들 모두 무죄임이 드러났고. 그러니 나와 내 가족도 그와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외다.” “음... 훗날 무죄로 다 드러날 것이다... 그럼 너와 네 가족의 범죄 혐의는 어떻게 결론이 났느냐? 네 말대로라면 검찰이 혐의를 조작했고, 바보 같은 판사들이 모두 유죄로 인정했단 말인데.” 염라대왕은 여전히 장민국의 말이 미덥지 못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안타깝게도 동생은 양동학원 사무국장 시절 채용비리와 소송사기 건으로 3년 형이 확정됐고, 아내 또한 딸자식 입시비리와 사모펀드 관련 자본시장법 위반으로 4년 형이 확정됐소. 그런데 나를 재판하는 과정에서 아내의 형량이 1년 불었고, 둘 모두 교도소에 있소. 이 모두 대법원 상고심에서 난 결정이오만,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도 용납도 할 수가 없소이다. 무엇보다 나 하나 잡겠다고 내 가족 모두를 탈탈 털어 만든 것이다 보니, 검찰이 혐의를 침소봉대한 측면이 너무 크기 때문이오.” “그럼 너는 어떻게 됐느냐?” “말해 뭣하겠소만, 나 또한 3년 2개월 1심 재판 끝에 실형 2년을 선고 받았소. 그 이유란 게 딸과 아들 입시비리와 법무부 장관 임명 전 민정수석일 당시 전 보산시 경제부시장 감찰을 무마했다는 건데, 참 기가 막힐 따름이오.” 장민국의 시큰둥한 대답에 염라대왕이 재차 물었다. “그럼 형을 다 산 것이냐? 네 옷차림이 감옥에서 올라온 것 같지는 않구나.” “그건 아니오. 1심에서 실형이 선고되긴 했지만, 항소를 이어가야하는 데다 증거인멸과 도주의 우려가 없어 법정구속은 되지 않았소.” “실형을 선고 받았는데 법정구속은 면했다... 그런 일도 다 있구나. 이승의 재판에서 흔히 있는 일이더냐?” “모르겠소.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아마 내가 처음이 아닌가 싶기도 하오. 어쨌거나 일이 이렇게 돼 교도소에 있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오. 차라리 입시비리 건으로 내가 먼저 재판을 받고 실형 구속됐다면, 아내는 집행유예로 나올 수도 있었을 것 같아서 말이오. 물론 연석진 검찰과 재판부가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았겠지만. 허허허...” 허탈함이 묻어나는 장민국의 웃음소리가 나직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분노와 공허, 증오와 연민, 그리고 복수와 절망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시간이 계속되다 급기야 염라대왕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온몸에서 기운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모든 걸 원상복구 시켜 딸 혜민에게 의사면허를 되돌려 줘야 하고, 여전히 옥살이를 하고 있는 아내의 분노를 어루만져 줘야 하는데, 어쩌다 여기에 와 있는 것일까, 아득함이 밀려들었다. 그때 염라대왕의 말이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에 꽂혔다. “지금껏 실형을 선고 받고도 법정 구속되지 않은 사례가 없고 네가 처음이라면, 이는 네 아내가 형을 살고 있는 것에 대한 배려이거나 법무부 장관을 지낸 이에 대한 특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례적인 경우임은 분명하고. 그런데도 너는 재판부가 검찰이 짜놓은 시나리오대로 움직인다고 하니 나로서는 납득하기 어렵구나.” “좀 전에도 말했지만, 아내에게 미안할 따름이오. 허나 이게 법무부 장관을 지낸 것에 대한 특혜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차라리 나를 욕보이는 것이라면 모를까.” 장민국이 염라대왕의 말을 쏘아붙이듯 받아쳤지만, 대왕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이승부를 펼쳐 이리저리 뒤적였다. 그리고는 어느 장에 멈춰 읽기 시작했다. 일순간 정적이 고여 들었다. 어둠이 알갱이로 가득한 공간에서 염라대왕을 통해 느꼈던 모든 게 뚝 끊겨버렸다.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고, 느낄 수조차 없는 곳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던 감각이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장민국은 대왕의 무신경에 애써 태연하려 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거대한 어둠으로 채워진 적막 속으로 더욱 깊이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애초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고, 존재를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그런 세계로. 그렇게 그는 모든 게 멈춰선 정적 속을 헤매고 있었다. 교몽당(蛟夢堂)
-
단편소설 무간지옥(無間地獄) #2[단편소설 무간지옥] • 무간지옥(無間地獄) : 불교에서 말하는 팔열지옥(八熱地獄)의 하나로, 사바세계(娑婆世界) 아래 2만 유순(由旬)되는 곳에 있는 지옥을 말한다. 불교 여러 경전에 묘사된 이 지옥의 모습은 옥졸이 죄인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수레에 실은 뒤 타오르는 불길 속에 넣어 몸을 태운다. 또한 야차들은 큰 쇠창을 불에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코·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지기도 하고, 철로 만들어진 매가 죄인의 눈을 파먹는 등 극심한 형벌을 받는 지옥으로 알려져 있다. #2 얼마나 잔 것일까. 엉겁결에 눈을 뜨니 사극에서나 봤음직한 흑룡포를 입은 노인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지금껏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것이었고, 여차하면 주위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섬뜩하다 못해 절로 기가 눌렸다. 그래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주눅 들지 말아야 한다. 내가 누군가. 나는 명재욱 정권에서 검찰개혁에 앞장섰던 장민국이다. 연석진 검찰총장의 저인망식 별건 수사도 버텨낸 내가 아닌가. “네 이놈, 그리 멀뚱멀뚱 처다 보지 말고, 이름과 네가 살았던 곳을 대거라. 나는 저승을 다스리는 염라대왕이니라.” “......” 흑룡포를 입은 노인의 말에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아! 이게 무슨 해괴한 말인가. 여기가 저승이고, 저자가 염라대왕이라니. 도대체 뭐가 어찌된 것인가.’라는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나는 지금 염라대왕 면전에 앉아 있고, 그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베란다에서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피곤을 이기지 못해 잠들었던 그 옷차림 그대로. “어디에서 온 누구냐니까? 아직 여기가 어딘지 정신을 못 차리는구나. 너는 1시간 전 저승 문턱을 넘었다. 그러니까, 죽었단 말이다.” 염라대왕은 나를 향해 한마디 쏘아붙이고는 표지에 ‘이승부’라고 적힌 책을 뒤적이다 무엇인가 찾았다는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음... 여기 있군. 조선땅 한양에서 온 장민국이로구나. 너는 이승에서 무엇을 위해 뭘 했느냐?” 염라대왕이 물음에 나는 눈에 힘을 더욱 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여기가 정말 저승인지 어딘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에게 밀리는 순간 잠들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어디에서 온 누군지는 아는 것 같소만, 조선에서 온 장민국이 맞소.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세상을 바꾸려 나름 고군분투했소. 조선 최고의 대학 법학과를 다닐 때는 독재정권에 맞서 학생운동을 했고, 졸업 후에는 모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법을 가르쳤소. 그러다 뜻을 같이 하는 정권에서 법무부 장관을 지내며 검찰개혁을 주도했고. 결국 그로 인해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졌지만.” “그만한 대학을 나왔다면 어찌 판검사가 되지 않고 교수가 됐느냐? 그랬다면 진즉부터 권력을 누렸을 텐데.” 내 말이 끝나자마자 염라대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내가 살다 온 나라에서의 판검사는 모두 권력의 주구 노릇으로 없는 죄도 만드는 것들뿐이오. 특히 독재정권에 부역한 판검사들은 더했고. 그래서 애초 사법고시는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소이다.” 염라대왕은 짓궂은 표정으로 내 말을 받아 던졌다. “혹시 합격할 자신이 없었던 건 아니고?” “대왕도 세인들이 나를 음해하기 위해 제기했던 의문과 같은 질문을 하는구려. 좀 전에 말한 것과 같이 나는 조선 최고의 대학 법학과를 나왔고, 사법고시쯤은 식은 죽 먹기였소. 이점 분명히 해두겠소.” 나는 차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감추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염라대왕이라는 자도 못돼먹은 인간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먹어치우고 있을 때였다. “그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는 건 어째서냐? 네 말처럼 조선 최고의 대학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에서 법무부 장관에 발탁됐다면 작은 꽃길에서 큰 꽃길이 열린 것인데.” 내가 목구멍으로 염라대왕에 대한 쓴맛을 넘기던 순간 대왕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질문을 이어갔다. “물론 그랬소. 당시 검찰총장이던 자가 나를 저인망 식 별건 수사로 털지만 않았다면, 나는 검찰개혁을 완성하고 강력한 대통령 후보로 떠올랐을 테고, 결국 대권을 잡았을 것이오. 하지만 그 배은망덕한 자가 나와 내 가족을 무간지옥에 빠뜨리고, 내 것인 대권을 가로채 가버렸소. 그러니 그 이후의 삶이 지옥일 수밖에.” “무간지옥이라......” 염라대왕은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섬뜩한 눈을 더욱 치켜뜨고 나직이 ‘무관지옥’을 대뇌였다. 교몽당(蛟夢堂)
-
단편소설 무간지옥(無間地獄) #1[단편소설 무간지옥] • 무간지옥(無間地獄) : 불교에서 말하는 팔열지옥(八熱地獄)의 하나로, 사바세계(娑婆世界) 아래 2만 유순(由旬)되는 곳에 있는 지옥을 말한다. 불교 여러 경전에 묘사된 이 지옥의 모습은 옥졸이 죄인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수레에 실은 뒤 타오르는 불길 속에 넣어 몸을 태운다. 또한 야차들은 큰 쇠창을 불에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코·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지기도 하고, 철로 만들어진 매가 죄인의 눈을 파먹는 등 극심한 형벌을 받는 지옥으로 알려져 있다. #1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다 장마가 시작된 초여름 어느 날 저녁, 장민국은 아파트 베란다 안락의자에 앉아 거세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들은 그에게 수십억대 아파트에 살면서 서민인 척 한다고 뒷말이 많지만, 그에게 이 아파트는 그저 정든 집일뿐이다. 아니,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휴식처라고 해야겠다. 베란다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맞춰 나지막이 흐르는 베토벤 운명교향곡, 그리고 창을 타고 흐르는 빗줄기가 장민국을 지난 몇 년간의 시간 속으로 끌어들였다. 빗줄기 하나가 흘러내렸다. 그 순간 명재욱 정권 들어 민정수석에 발탁되고, 이후 법무부 장관에 임명됐지만 한 달 만에 사퇴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딸 혜민 부정입학 건으로 4년 형이 확정된 아내는 여전히 감옥에 있고, 면회를 가면 울분을 삭히지 못해 연신 히스테리를 부렸다. 그리고 의사 면허가 취소된 딸은 의연한 척 하지만 눈에 띄게 말수가 줄었다. 그런 가운데 며칠 전 관서대에서는 자신의 교수직 파면을 결정한 상황이라 착잡함이 여러 빗줄기와 엉켜 흘러내렸다. 생각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시간들이 이어진 탓일까, 피곤이 몰려들었다. 이상한 건 이따금씩 심장을 죄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관서대 파면 결정 직전 오랜만에 명재욱 전 대통령을 만났고, 그의 책방 점원 노릇을 하고 온 후부터는 피곤과 함께 가슴 통증이 기습작전 하듯 밀려들었다. 베란다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빗소리를 자장가 삼은 눈꺼풀이 점점 가라앉았다. 교몽당(蛟夢堂)